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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 개발 놀이

이 날 준비한 구성요소들이라고 착각하면 오산. 구성요소들 중 극히 일부.

발단 : 전 직장상사에게 요리에 관한 간단한 질문을 해 보았다.

“준, 키친 테르(Kitchen Ter(re). 우리 사장님의 3호점이며 파스타 요리에 보다 더 집중한다)에서 파스타 어떻게 만드는 지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어요?”

라는 간단한 질문…

준은 아주 자세하게 답해주었다. 미리 반 쯤 익혀둔 파스타를 톰카 (tom kha, 코코넛 우유 육수)로 마무리해서 코팅을 해준다고.

그러고나서 준은 내가 원한다면 우리집에서 같이 해보자고 말했다.

아주 좋다. 요리를 배우는 데에는 직접 해보면서 배우는 것 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약 12시간이 지나있었다.

그렇게 날짜를 잡아 준이 우리집에 왔다. 준이 좋은, 그리고 예쁜 재료들을 많이 챙겨왔고 그 짐들을 풀기 시작했다. 준은 앉아서 ‘오늘 이런 식으로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설명을 해주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약 12시간이 지나있었다.

12시간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 지, 아래 사진으로 확인해보자. (사진 설명은 pc버전에서만 보이는 듯 하다)

-준이 주도적으로 이 날 하루를 이끌어나갔고 플레이팅 또한 준이 다 했다.

준은 옷 입히기 수학문제처럼 메뉴구성을 하는구나

시작하기 전, 준은 이렇게 말했다.

“놀이처럼 해봐요”

나는 생각했다. ‘휴일에 놀면서 요리하자는 것 아니었나? 내가 너무 긴장할까봐 해주는 말인가?’

하지만 재료 준비가 어느정도 준의 계획대로 진행이 되고나서 보니 준이 ‘놀이’라고 했을 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마치 옷 입히기 놀이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윗도리는 몇 가지, 아랫도리는 몇 가지 모자는 몇 가지, 했을 때 경우의 수를 구하시오’ 하는 수학문제처럼 말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일단 맛있는 구성요소들을 여러가지 만들어 놓고 한꺼번에 눈 앞에 둔 후, 이렇게, 저렇게 조합을 해보는 것이다. 나에게는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와는 정반대의 방법의 메뉴개발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메뉴를 짜야할 때 이렇게 한다. 아마 가장 평범한 방법일 것이다.

  1. 테마: 전체 식사에서 그 요리의 위치, 요리의 느낌 등

    ex. 따뜻한 본식, 육류, 프랑스 남부의 따뜻함.

  2. 메인 재료

    ex. 닭고기, 오리고기, 소고기 등

  3. 가니쉬의 테마

    ex. 찜닭에 들어가는 채소들을 가니쉬로 쓰자!

  4. 실제로 시장에 나와있는 재료들을 보면서 1,2,3에 부합하게 구입, 즉석해서 ‘이것도 잘 어울리겠네’하는 것들 구입.

하지만 준의 방식은 일단 흥미로워 보이는 재료들을 수두룩하게 사두고, 거기서 만들 수 있는 재밌고 맛있는 구성요소들을 다양하게 준비해두고, 마지막에 조립하듯이 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메뉴 개발도 정말 좋구나 배우게 되었다. 무엇보다 접시 위에 재료를 하나하나 올려놓는 그 순간에도 계속 자유분방하게 조합을 생각할 수 있고, 또한 구성요소를 만들 때도 무언가에 구속돼있지 않는 느낌이 있다.

준과 함께 해 본 메뉴개발 방식을 정리해보자면 이러하다.

  1. 대략적인 느낌을 생각한다.

  2. 흥미로운 재료들을 준비한다.

  3. 그 재료들로 1.의 느낌을 살릴 수 있는 구성요소들을 생각하고 만든다.

    옷 입히기에 모자, 윗도리, 아랫도리가 있다면 이 날의 구성요소에는 다음과 같은 카테고리가 있었다 :

    . 파스타 3종

    . 국물 2종

    . 퓨레 농도의 소스 2종

    . 비에르쥬 소스 2종 (sauce vierge, 주로 일정한 크기로 다진 재료들을 버무린 드레싱 같은 소스)

    . 컴파운드 버터 3종

    . 크런치 2종

    . 채소 가니시 6종

    . 마무리용 재료 (허브, 치즈 등등)

  4. 플레이팅 하면서 조합해본다.

수학 옷 입히기 문제를 풀 듯이 가지수만큼 경우의 수가 다 나오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우리의 체력적 한계도 있고, 아무리 자유분방하게 구성요소들을 준비했어도, 잘 어울리는 조합은 어느정도 정해져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굉장히 값진 경험이었다. 자극도 받았고 요리 아이디어도 얻었으며, 파스타 전문점에서 파스타를 만드는 방법도 배웠다. 게다가 음식 사진들도 마치 미슐랭 스타 셰프가 나오는 다큐멘터리처럼 나와서 우리 둘 다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렇게 우리는 체력이 바닥날 때까지 이것저것 시도했다. 결국 내가 먼저 체력이 바닥나서 “하나만 더 하고 우리 이제 고기 먹어요”라고 말해버리며 이 날의 요리놀이를 마무리했다.

정리를 하고는 내가 구운 뿔닭 가슴살, 닭 쥐 (jus), 그리고 남은 채소 가니쉬를 와인과 함께 들며 작은 뒷풀이 시간을 가졌다.

이 날의 경험 중 재미있던 부분은 같은 오너셰프의 문하생 둘로서 요리의 코드가 같다는 것이다. 요리 스타일이 아예 다른 사람과 요리할 때의 느낌을 외국어로 대화하는 느낌이라고 한다면 준과 요리하는 것은 오랜만에 모국어로 대화하는 느낌이었다. 쓰는 향채가 같고, 좋아하는 허브가 같고, 추구하는 맛, 플레이팅이 같다. 직장동료와 취미로 요리를 하면 이렇게 편하고 재밌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