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요리사 이직 일기- 2. 디저트 파트의 저주

디저트를 할 줄 안다는 것은 나중에 돌이켜보니 내 직장생활에는, 그리고 내 제 키친 갤러리 커리어에는 저주와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엔 디저트를 맡았던 것이 내가 첫 사직서를 내게 되는 첫 단추가 되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에게, 인턴으로서 디저트 셰프 자리를 맡는다는 것은 아직 축복이었다.

입맛이 보통 까다로운게 아닌 윌리엄 셰프, 그리고 천재적인 창의성을 가진 폴 셰프를 곁에 두고, 나는 여러 디저트를 만들고, 가끔은 두 셰프의 지도 아래 직접 디저트를 창작할 기회도 가졌다.

처음에는 아이스크림 크넬 (Quenelle, 크림 따위를 끝이 뾰족한 달걀모양으로 만든 것을 이르는 말, 퀜넬이라고도 한다)도 할 줄 몰랐던 내가 이제 크넬을 속사포로 떠내는 것은 물론이고, 제 키친 갤러리 식당에 제과를 전공해서 디저트 셰프로 왔던 사람들 보다도 더 잘 해내고 있다는 기분은 정말 짜릿했다. 요리를 늦게한 나에게 ‘역시 나는 식당일에 재능이 있어’라는 자신감이 드는 것은 내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보상이었다.

한 편, 디저트를 시작하기도 전에, 그러니까 차가운 전채요리를 맡았을 때부터 제 키친 갤러리 주방이 돌아가는 모습에 의아했던 것이 있었다. 바로 디저트 파트에 대한 열악한 대우이다. 일반적으로 제 키친 갤러리처럼 미슐랭 별이 하나 있는 식당들의 코스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 아뮤즈 부쉬 (Amuse-bouche, 보통 메뉴를 선택하며, 혹은 식당에 따라서는 메뉴 선택 후 첫 요리를 기다리며 먹을 수 있게 나오는 작은 음식들)

  • 차가운 전채요리

  • 뜨거운 전채요리

  • 생선 요리

  • 고기 요리

  • 디저트

어떤 음식이 가장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정말 어렵다. 미슐랭 별이 있는 정도의 식당들은 각자의 철학에 ‘완벽한’ 식사를 제공하려고 하는데, 그 ‘완벽한’ 식사가 되려면 코스에 포함된 각각의 요리가 다 중요해진다.

아뮤즈 부쉬와 차가운 전채요리는 식당의 첫 인상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다.

뜨거운 전채요리는 본격적으로 입맛을 돋궈주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다.

생선과 고기는 식사의 주인공 같은 재료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다.

디저트는 손님들이 식당 문을 나설 때 직접적으로 기억이 남는 음식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중요하다. 즉, 주방 일을 할 때도 어떤 파트가 다른 파트보다 더나 덜 중요한 것은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디저트 셰프 역할을 맡으며 겪은 두 주방장은 디저트를 대하는 자세가 나와는 달랐다. 첫 주방장은 여러번 등장했다시피 셰프 폴이었고, 두 번째 주방장은 폴이 주방장일 당시 부주방장이었던 셰프 파볼이었다. 셰프 폴은 단순히 디저트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고 요리만 하는 순박한 사람이라서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약간은 디저트 파트를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파볼은 디저트 파트를 아예 무시했고, 우습게 생각했다. 그는 주도적으로 주방 직원들 사이에 디저트를 무시하는 분위기를 만들어갔다.

그래도 나는 아직은 자신감이 차 있던 때였고, 이제껏 디저트를 맡아온 디저트 셰프들보다 내가 더 잘해오고 있으니까 앞으로 다가올 문제도 나에겐 장애물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제과만 전공한 사람들보다는 내가 더 요리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기 때문에 요리 파트와의 조율이 어렵지는 않았다. 오븐을 사용하는 순서, 작업대나 냉장고, 냉각기 사용에 대한 우선순위 조율 등등 나는 요리파트 직원들과 대화를 통해 요리파트와 디저트파트가 둘 다 만족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꽤 잘 해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국 디저트를 무시하는 제 키친 갤러리의 태도는 실무에서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된다.

아무리 디저트 파트에 주어진 일을 잘 해내고 있다고 한들, 나는 결국 요리사이기를 원했다. 사장님에게 반복적으로 요리로 돌아가고 싶다는 표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장님은 새 파티셰를 뽑는 것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결국 나는 1년 반이라는, 디저트 ‘대타’로는 꽤나 긴 시간을 디저트 파트에서 보냈고 결국은 그리고 마침내 요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때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제 키친 갤러리 안에서 나라는 존재는 이러했다. “인턴 시절부터 이미 하나의 파트를 맡아서 재고, 생산, 그리고 견습생들까지 관리할 수 있었던, 잠재력이 큰 직원”. 이것이 내가 스스로 생각한, 그리고 그렇게 취급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 내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렇다고해서 1년 반이라는 시간을 ‘대타’로 보낸 것에 대한 대단한 보상을 바란 것도 아니다. 단지 ‘연호 그동안 고생했다. 이제 우리랑 같이 재밌게 요리하자!’ 정도의 환영을 바랬던 것 같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요리로 돌아온 직후 셰프 폴이 나에 대해 한 말, 아직도 마음 한 편에 남아있는, 내 마음에 크게 상처가 된 말이 있다.

“연호, 쟤 아무것도 할 줄 몰라. 잘 지켜봐”

그것도 나의 상급자에게 한 것도 아닌, 같이 인턴을 하고 비슷한 시기에 직원이 된, 직급도 같은 직장동료에게 이 말을 했다. 한 편으로는 정말 큰 상처였고 한 편으로는 화가 났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번에는 다시 요리사로서 능력을 증명하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기에 상처는 무시하고 주어진 일을 헤쳐나가는 것에 집중했다. ‘제 키친 갤러리에서의 디저트는 “너무 쉽고 누구든 할 수 있고 딱히 하는 일도 없는” 파트로 취급하고 무시했기 때문에 나를 그렇게 취급했구나’ 라는 깨달음이 온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그렇게 쉬우면 너네가 하던가! 나는 언제든지 요리로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그렇게 묵묵히 뜨거운 전채요리를 맡았다. 얼마나 독하게 일을 했는지, 함께 하는 직장동료가 지각을 하여 내 일이 많아지면 오히려 기뻤다. 이 직장동료 없이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회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독하게 일을 하다보니 앞서 상처받았던 말에 대한 치유가 되는 말도 들을 수 있었다.

“연호가 맛 봐서 괜찮았으면 됐어”

이 또한 셰프 폴이 한 말이다. “연호 아무것도 몰라”라고 상처를 줬던 그 셰프 폴 말이다. 제 키친 갤러리의 뜨거운 전채요리는 뜨거운 국물이 함께 나가는데, 매 서비스 시간 때마다 셰프가 맛을 봤다. 하지만 어느날은 폴이 저렇게 말을 했다. 드디어 요리사로서도 인정을 받은 것 같은 기쁜 날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해도 기회는 잘 오지 않는다는 장벽을 느끼게 되는 사건이 있었다.

때는 우리 주방팀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인 고기와 생선 파트가 공석이 되는 때였다. 나의 직장동료들은 앞으로 우리의 직책 이동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저마다 상상력을 동원해 의견을 내놓았다. 나는 이 때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더 중요한 자리로 이동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될 수도, 저렇게 될 수도 있겠다” 이야기를 하는데, 그 누구도 내 이름은 언급 조차 하지 않는 것이었다. ‘어떻게 맨날 지각해서 나 혼자 웬만한 일을 다 하게 만드는 애의 이름은 언급하고 내 이름은 언급하지 않을 수가 있지?’ 내가 해온 고생이 나를 배신하는 기분이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다. 파볼이 만든 디저트에 대한 멸시 풍조 때문인지, 내가 프랑스어를 원어민 만큼 하지는 못해서인지, 아니면 목요일 밤마다 퇴근 후 있었던 술자리에 나는 거의 항상 빠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나는 아시아 사람이어서인지……. 심지어 이 이야기는 내 앞에서 오간 이야기였다. 내가 이 이야기를 듣고 기분이 안 좋을 것이라고는 그들이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내가 언급되지 않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이 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를 악물고 열심히 하는 것을 멈췄다. 나도 내 직장동료처럼 가벼운 지각을 하기 시작했다. 쉬는시간에 사장님이 주방에서 무언가 작업을 하면 못 본 척 나가서 내 쉬는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아마 매일 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신체적으로는 물론 심적으로 한계에 다 다랐던 어느 날, 내가 내놓은 직원식사에 무슬림 직원이 불만을 표출했다. 아마 월요일 점심이어서 간단하게 카르보나라를 준비했던 날이었던 것 같은데, 무슬림은 돼지고기를 먹을 수 없으니 따로 파스타에 스크램블 에그를 준비해줬다. 그러자 “연호는 맨날 우리한텐 아무거나 먹인다. 연호는 우리 무슬림 따위는 신경도 안쓴다”라고 불만을 표출한 것이다.

이제껏 쌓여온 스트레스, 온몸에 쌓인 피로가 한계에 다다른 시점에 나에 대한 비난이 들어오니 참을 수가 없었다. 일단 급한대로 무슬림 직장동료들에게 뭔가 더 정성이 들어가보이는 오믈렛을 부쳐준 후 (월요일엔 갑자기 다른 고기로 무언가 해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냉장고 문을 열고 그 안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상상했다.

‘나는 지금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이다’

너무 간절하게 눈을 뜨면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이길 빌었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눈을 뜨면 제키친갤러리의 주방 안이었다. 그 공간에 계속 있어야한다는 것이,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이 아니라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눈물이 나기 시작했고 직장동료들에게 눈물을 보이기 싫었다. 그래서 나는 지하로 내려가 지하 냉장실 안에 들어갔고 그 안에서 다시 똑같은 주문을 외웠다.

‘나는 지금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이다’

더 간절하게 빌어봤다. 게다가 냉장고가 아닌, 냉장실이니 환풍기의 소리가 더 그럴싸하게 비행기 소리 같았다. 그러나 예상했다시피 눈을 뜨면 냉장실 안이었다. 그렇게 팔꿈치에 고개를 파묻고 울고 있으니 나에게 불만을 표현했던 직장동료 아다무(Hademou)가 나에게 와 사과를 했다. 나는 아다무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닌데, 사과할 필요 없는데, 그것을 설명할 힘조차 없었다. 그렇게 최대한 오랜 시간 불이 꺼진 냉장실 안에 홀로 서있다가 올라가 점심 서비스를 했다.

그날 오후 준비시간에도 눈물을 떨구면서 일을 했다. 그 다음날 아침에도, 오후에도, 그리고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 먼 땅에, 이렇게까지 고생하고, 푸대접을 받으며 살아야하는지, 한국은 왜이리도 프랑스와 멀리 떨어져있는지.

그러다가 셋째 날이 지나니 마음이 괜찮아졌다. 이유는 전혀 모르겠지만 다시 일 할 마음이 생겼다. 매일 우는 나에게 아무 말도 걸지 못하던 직장동료들도 내가 다시 웃고 노래하기 시작하자 이제껏 뭐가 힘들었냐며 물어봐 주었다. 나는 괜찮다고, 고맙다고 했다. 그냥 한국이 그리웠다고 했다. 그렇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나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 연약해진 나의 심신 상태에 사장님은 다시 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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